Purpose
The purpose of the study was to re-evaluate Florence Nightingale’s achievements celebrating the 200 th anniversary of Nightingale’s birth and to reflect on her legacy.
Methods: We conducted an extensive literature review with key words in Korean and English using 9 electronic databases, related data, books, articles, websites, and secondary literature.
Results: As a result of this study, the five legacy of Nightingale as a social reformer were examined. First, founding nursing in response to social needs. Second, reform of the health care system. Third, a practical social activist who promoted social change for the public good. Fourth, first adoption of health statistics. Fifth, emancipation of women. Nightingale’s legacy as a social reformer has had an considerable influence on our society so far.
Conclusion: Nightingale was a pioneer in nursing, but she was a social reform activist who successfully transformed the medical systems and even the whole social system based on her keen insight, religious vocation, profession vision, and personal competency. In the middle of World’s chaos and uncertainty due to the COVID-19 pandemic, it seems more necessary than ever to embody the legacy of Nightingale as a social reformer, and put it into practice.
The purpose of the study was to re-evaluate Florence Nightingale’s achievements celebrating the 200th anniversary of Nightingale’s birth and to reflect on her legacy.
We conducted an extensive literature review with key words in Korean and English using 9 electronic databases, related data, books, articles, websites, and secondary literature.
As a result of this study, the five legacy of Nightingale as a social reformer were examined. First, founding nursing in response to social needs. Second, reform of the health care system. Third, a practical social activist who promoted social change for the public good. Fourth, first adoption of health statistics. Fifth, emancipation of women. Nightingale’s legacy as a social reformer has had an considerable influence on our society so far.
Nightingale was a pioneer in nursing, but she was a social reform activist who successfully transformed the medical systems and even the whole social system based on her keen insight, religious vocation, profession vision, and personal competency. In the middle of World’s chaos and uncertainty due to the COVID-19 pandemic, it seems more necessary than ever to embody the legacy of Nightingale as a social reformer, and put it into practice.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나이팅게일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0년을 세계 간호사의 해로 정하고 나이팅게일과 전 세계 간호사들이 그동안 인류의 건강 향상에 기여해 온 노고와 헌신에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급변하는 사회현상과 맞물려 많은 새로운 학문이 생겨나고 한편으로는 점차 영향력이 약해지는 학문이 혼재하고 있지만 현재의 간호학은 인류의 생존과 존엄을 유지해 나가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학문으로서의 필요성과 실용적 가치가 가장 높은 학문 중의 한 분야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1].
간호학은 인간의 삶의 전 과정 및 사회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으나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시켜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준까지 발전시킨 사람은 나이팅게일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은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철학, 고전, 역사, 문학, 수학, 언어 등 매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당시 오늘날의 간호사에 해당하는 일은 상류계층이 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부모는 간호사가 되고자 했던 나이팅게일의 선택을 반대했지만 그녀는 크리미아 전쟁 당시 38명의 젊은 여성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여 “백의의 천사”, “등불을 든 여인”과 같은 칭송을 들을 정도로 헌신적으로 병사들을 돌보았고, 그 결과 수많은 전상자의 생명을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는 귀국 후에 간호사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이어져 그녀가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2].
나이팅게일의 간호학 창시는 의사라는 직종이 유일하였던 의료계에 새로운 직종을 등장시켰고, 그 이후 지금까지 16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간호조무사(certified nursing assistant), 물리치료사(physical therapist), 작업치료사(occupational therapist), 의무기록사(medical record administrator) 등 수많은 파생 직종을 조직적으로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Suppl. 1). 나이팅게일 이전이나 비슷한 시기에 전쟁터에서 의사와 함께 환자를 돌본 여성들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못한 것과 비교할 때 나이팅게일의 업적과 유산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여성의 아이콘이자 인류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1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당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나이팅게일의 업적이 단순히 그녀의 높은 신분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간호직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으로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탁월한 통찰력과 비전,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일부 역사가들은 나이팅게일의 탁월함과 위대함은 간호학에 국한되지 않고 인접 분야 학문뿐 아니라 당시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2]. 나이팅게일은 간호에서의 성공경험과 비전을 바탕으로 사회개혁을 실천하고자 했던 위인으로 간호학 영역을 초월한 진정한 사회개혁운동가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이팅게일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들이 크리미아 전쟁 당시의 업적과 간호학의 창시, 응용 통계, 병원과 공중보건 전문가의 측면에 국한되어 소개되고 있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나가고자 했던 그녀가 어떠한 철학적 기반과 접근법으로 당시 영국 사회를 통찰하고 변화시켜 나갔는지에 대한 포괄적인 고찰은 부족한 실정이다[4]. 이에 본 저자들은 심층 문헌고찰을 통해 간호학을 창시하고 사회적 변화를 이끈 나이팅게일의 탁월함과 위대한 업적을 그녀가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을 포함하여 그녀의 가치관과 철학에 기반하여 통찰해 보고 사회개혁가로서 나이팅게일의 철학과 성공 요인, 그리고 남겨진 유산을 포괄적으로 반추해 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나이팅게일의 삶을 간호학을 넘어서 사회개혁가적 측면에서 통찰해보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나이팅게일 관련 광범위한 문헌고찰 및 주요 웹 기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관련 자료를 검색하였다. 문헌은 국내 5개, 국외 4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검색하였다. 국내 문헌의 경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사회개혁”, “나이팅게일”과 “사회적 영향”, “나이팅게일”과 “발전”, “나이팅게일”과 “사회적기업가”를 주요어로 조합하였고, 국외 문헌의 경우 “Florence Nightingale” and “social reform”, “Florence Nightingale” and “social impact”, “Florence Nightingale” and “evolution”, 그리고 “Florence Nightingale” and “social entrepreneur”를 주요어로 자료검색을 시행하였다. 국내 문헌은 학술연구정보서비스(Research Information Sharing Service, RISS), 한국학술정보(Korean studies Information Service System, KISS), 과학기술정보통합서비스(National Digital Science Library, NDSL), 학술데이터베이스서비스(Datab Base periodical information academic, DBpia) 및 국회도서관(National Assembly Library, Nanet)의 학술연구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한편의 문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외 데이터베이스는 Excerpta Medica dataBASE (EMBASE), Cumulative Index to Nursing and Allied Health Literature (CINAHL), MEDLINE 및 PubMed를 사용하여 검색하였다. 국외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된 문헌은 총 109편이었으며, 문헌에 대한 중복 검사를 시행한 결과 54편의 문헌이 제외되었다. 이후 55편의 문헌에 대해 제목과 초록을 확인하여 50편의 문헌이 제외되었고, 원문을 확인하여 영어로 기술되지 않은 문헌 1편이 추가로 제외되었다. 최종 4편[4, 5, 6, 7]의 문헌을 기술에 포함하였으며(Figure 1), 그 외 나이팅게일, 크리미아 전쟁,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시대적 배경, 의학사 및 감염병 역사 등에 관한 서적, 논문, 기사, 웹사이트, 2차 문헌 등을 읽고 필요 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고증을 거쳐 고찰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캐나다 Guelph 대학에서 구축한 나이팅게일 전집(The Collected Works of Florence Nightingale) 데이터베이스는 현재 남아있는 나이팅게일 관련 모든 자료를 모아놓은 사이트로(cwfn.uoguelph.ca) 내용의 확인과 검증을 거치는데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Figure 1
Flow diagram of study selection process.
문헌고찰 결과, 나이팅게일은 간호학에 기반을 두면서도 사회개혁가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다방면에 탁월한 업적을 유산으로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를 통해 고찰한 사회개혁가 나이팅게일의 철학과 성공요인, 그리고 그녀가 남긴 유산은 Figure 2와 같이 요약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내용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자 한다.
Figure 2
Scheme of Nightingale's legacy as a social reform activist.
나이팅게일은 16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낀 신비로운 순간을 경험한 후 자신의 소명은 간호사가 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처럼 나이팅게일의 삶을 간호전문직으로 이끈 원동력은 종교적 소명의식이었으나 간호사로서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는 플라톤(Platon)의 철학적 교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8].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인 윌리엄 나이팅게일(William Nightingale)로부터 다양한 분야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전통적 교육을 중시했던 아버지는 전통 철학을 강조하였으며, 이것이 그녀의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토대가 되었다. 특히 나이팅게일이 선한 것에 가치를 두고 타인에게 배운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플라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3]. 플라톤은 이상적인 공동체의 지도자는 평생에 걸쳐 교육을 통해 배운 이성과 선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하며 개인의 삶 대신 사회의 수호자(societal guardian)로 살아가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플라톤의 철학은 나이팅게일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고 그녀로 하여금 기꺼이 사회의 수호자로서 강한 책임감으로 일생을 공공서비스와 사회개혁에 매진하도록 이끌었다[9].
나이팅게일은 일찍이 전인적 관점(holism)에서 간호를 실천해 왔는데 이러한 관점 또한 전인적 인본주의적 관점을 지향한 플라톤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인적 관점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전체 인간으로서의 욕구를 가진 한 개인으로 대상자를 간호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플라톤의 선을 추구하는 방향이자 진리를 알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회의 수호자로서의 덕목과 맞닿아 있다고[8]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나이팅게일이 사회의 수호자로서 업무를 수행할 때 광범위한 관점과 전인적 비전을 채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나이팅게일은 단순히 기술적이고 단편적인 간호가 아니라 간호대상자의 증상 이외 환경과 심리 · 사회적인 측면까지를 포함한 전인적 간호를 수행하고자 하였으며, 이로 인해 간호학은 처음부터 기술적인 부분이 강조되었던 의학과 차별화된 학문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8, 10].
나이팅게일이 사회적 수호자로서의 본인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식은 철저히 실용과 실천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상은 전쟁터로 달려가 부상병을 돌보는 것과 같이 궂은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11]. 그 근거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길은 단지 이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위해 행하고 고난을 겪는 것이다(“The way to live with God is to live with ideals, not merely to think about ideals, but to do and suffer for them”)[12] 라는 그녀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나이팅게일의 실용적 사상과 신념은 그녀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key)였고 실제로 그녀는 일생에 걸쳐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실천한 삶을 살았던 진정한 실용주의자였다[12].
나이팅게일이 활동한 19세기 중반은 미생물에 대한 개념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1857년에 효모와 세균을 구분하여 효모가 발효하면 맛있는 포도주가 생성되지만 세균이 오염되면 포도주가 부패하여 못 먹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보다 앞서 이탈리아의 필리포 파치니(Fillipo Pacini, 1812~1883)는 현미경으로 콜레라균을 관찰하는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확실한 개념은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1876년에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1843~1910)가 탄저의 원인이 되는 세균을 찾아내고, 특정 세균이 특정 감염병의 원인임을 증명하는 4가지 가설을 주장하여 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도 감염병의 원인은 미아즈마(miasma)라 믿는 이들이 많았다. 나이팅게일 또한 미아즈마 이론의 신봉자였다[13]. 미아즈마란 고대 그리스어로 오염을 의미하는 용어로 나쁜 공기를 가리킨다. 감염병은 썩은 유기물질에서 뿜어내는 나쁜 기운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 미아즈마설 또는 미아즈마 이론이다. 이 이론은 19세기에 미생물이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감염병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었으며, 19세기에는 비만과 같이 감염병이 아닌 질병도 음식 냄새를 잘못 맡으면 그 나쁜 기운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까지 발전하였다[14]. 현대의학 지식으로 볼 때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지만 그만큼 미아즈마설의 영향이 컸음을 엿볼 수 있다. 비록 미생물의 존재를 감안하지 않은 미아즈마설이 이론적으로는 틀렸다 하더라도 물과 공기를 깨끗이 하는 것은 감염병 해결에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미아즈마설에 따라 나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해 위생적인 물과 음식을 공급하려는 정책은 실제로 감염병 해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14].
언급한 바와 같이 나이팅게일은 미아즈마설의 신봉자였으므로[13] 세균감염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쁜 기운이 다양한 병의 원인이라 믿었다. 이에 나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위생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위생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위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대로 나이팅게일은 미아즈마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병원의 위생을 개선하고 깨끗한 물과 음식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간호사들이 병동을 깔끔하게 관리하도록 했고, 환자를 목욕시키고 깨끗한 옷을 입도록 했으며, 더 나은 음식과 물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병동의 공기를 자주 환기시키도록 하였으며 의료기구와 물품을 상하게 하는 환경을 개선하였다[13]. 그 결과 사망률이 크게 감소하였으며, 그 후에 위생운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전문 인력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간호학교 창설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한편, 나이팅게일이 크리미아에서 활약을 시작할 때쯤 런던에서는 존스노(John Snow)가 콜레라 발생의 주요 원인은 상수도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냈다. 이로써 위생에 대한 개념은 점점 강화되기 시작했으며, 크리미아 전쟁 후에 나이팅게일이 영국에서 입지를 넓혀가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비록 미생물에 대한 개념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아즈마설을 따른 것이 당시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주효하였고, 사회개혁가로서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 인구의 도시집중이 이루어지면서 주거환경은 매우 열악하였고 이로 인해 각종 감염병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15]. 이로 인해 가난한 노동자들의 수명은 짧았고 이들의 건강이 사회 문제로 크게 인식되었다. 위생운동을 이끈 이들은 미아즈마설에 기초를 두고 고여 있는 하수, 묘지나 도살장에서 발생하는 부패에 의해 생겨난 가스와 반응을 하는 그 무엇인가가 감염병을 일으킨다고 믿었다[15]. 1832년에 구빈법 개혁을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838년 에드윈 채드위크(Edwin Chadwick)가 이끄는 구빈법 사문위원회는 내무장관에게 런던에서의 질병을 감시하기 위해서 의학조사관 채용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처럼 노동자들의 건강 개선을 위해 정부가 분주하게 대책을 마련하고 있을 즈음에 마침 크리미아 전쟁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나이팅게일이 돌아와서 위생운동과 인력양성을 주장하자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으므로 그녀의 제안이 정부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흔히 나이팅게일을 간호학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그런 설명으로는 나이팅게일의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 와카스 아메드(Waqas Ahmed)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후 50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한 책에서 나이팅게일이 “박식가이자 여러 주제에 대해 광범위하게 알고 있는 사람,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영역에서 출중한 재능을 발휘하며, 방대하고 종합적인 사고와 방법론을 지닌 사람”을 의미하는 폴리매스(polymath)에 속한다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그의 기술은 나이팅게일이 여러 분야에서의 업적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은 소수의 여성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6]. 나이팅게일은 크리미아 전쟁에서 군 병원을 개혁하여 병원관리자로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으며, 전쟁 후에는 간호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였고, 더 나은 의료체계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개혁운동가로 일생을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숫자와 통계에 뛰어났고 글을 아주 잘 쓰는 문필가이기도 했다[2].
나이팅게일이 데이터 분석과 통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스쿠타리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원의 상황은 비참할 정도로 열악하였으나 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어떠한 실태 파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일목요연한 근거(evidence)가 필요했기 때문이다[17]. 마침 어릴 때부터 수학에 매력을 느껴 숫자로 상황을 정리하는 것에 특별한 재능을 지녔던 나이팅게일은 곧바로 환자의 숫자와 질병의 종류, 사망자 수, 물품 보유 현황 등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숫자로 정리하고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실태 파악이 이루어지니 문제가 명료해지고 이러한 문제를 차례대로 해결해 나가는 방식으로 상황을 개선해 나갔다. 나이팅게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분석자료를 일반인뿐만 아니라 정책결정자들에게 널리 알리고 설득하여 끊임없이 시스템을 개혁해 나갔다. 이와 같이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분석적/통계적 재능을 활용하여 숫자를 무기 삼아 자신이 추구하는 바대로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었다[18]. 나이팅게일은 숫자와 통계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소양 역시 풍부하여 일기, 편지, 논문, 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은 글을 남겼으며, 남아 있는 자료로부터 그녀의 생각, 가치, 그녀가 관심을 둔 수많은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신념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 역시 그녀가 어떤 사실이나 현상을 전달하고 부조리와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귀족 출신이면서 남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 나이팅게일의 선택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고귀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감당해야 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나이팅게일의 행동과 역할이 항상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자신에 대한 시기와 질투, 비방을 자주 직면하기도 하였고 강한 신념으로 일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는 오해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나이팅게일은 비판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자료를 이용하여 설득하려 했고 탁월한 필력과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극복해 갔다[19]. 크리미아 전쟁과 인도에서의 활동을 토대로 영국 사회를 바꾸는 일에 앞장선 그녀의 활동이 탁월했음은 분명하지만 사회개혁이라는 목적을 이루기까지는 여러 가지 개인적 역량에 기반한 다양한 전략을 거론할 수 있겠다.
첫째, 아랫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따르게 했다[20]. 스쿠타리에서 나이팅게일은 병사들에게 집으로 편지를 쓰게 함으로써 가족과 연락을 취하게 하였고,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가족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군대가 부상당한 병사들과 그 가족을 도와주는 일은 없던 차에 나이팅게일이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병사들에게 급여로 받은 돈을 집으로 보내 주는 제도를 도입하고, 독서실과(알코올 유혹을 계속 받는 병사들에게 대안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함으로써[11] 병사들과 동료로부터 자신에 대한 신뢰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둘째,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이들과 대항하지 않고, 빅토리아 여왕과 시드니 허버트(Sidney Herbert)의 신뢰를 이용했다[12]. 아무리 나이팅게일이 귀족 신분이고 사교계에서 상류층에 걸맞은 교양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 견고하였던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이들의 보수적인 태도와 맞서 싸우는 것은 거부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반대하는 남성들과 직접 맞서 싸우지 않은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선택이었다.
셋째, 나이팅게일은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종교적인 비전을 초월하여 업무에 임했으므로 종교적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21]. 그녀는 업적에 대한 좋은 평가의 원인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그녀가 사망한 후 다양한 종교집단에 의해 칭송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이유가 되었지만[19], 역사적으로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 종교 갈등에 의한 전쟁이 수시로 일어났음을 감안하면 종교적인 면을 내세우지 않고 활동한 것은 불필요한 논쟁에 휩싸이지 않는 좋은 전략으로 작용했다.
넷째, 나이팅게일은 환자의 위생문제, 건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녔다. 따라서 나이팅게일의 문제해결 방식은 언제나 근본적이면서도 총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나이팅게일의 활동 후 크리미아 전쟁에서 병사들의 사망률을 6개월 동안 42.7%에서 2.2%로 낮출 수 있었던 것은 병실의 환경개선은 물론 급식체계 개선, 휴게실 설치, 우편제도와 저금제도 실시, 군인가족 돕기, 군수물자 공급,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한 외부의 자원 확보, 동료와의 협력과 신뢰 구축, 교육, 자문 활동, 그리고 병원 관계자, 정치인, 사회지도층 설득을 포함하여 전방위적으로 접근해 나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22].
나이팅게일은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이지만 그녀 이전에도 오늘날의 간호사에 해당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있었고, 전쟁터에 가서 부상자들을 돌본 이들도 많았다[2]. 1805년에 자메이카 킹스톤에서 출생한 매리 시콜(Mary Seacole)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크리미아 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의 사비를 들여서 1856년에 영국 호텔(British Hotel)이라 이름 붙인 시설을 설립한 후 병들고 부상당한 이들을 위해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의료적 도움과 함께 사회복귀가 가능할 때까지 돌봐주는 의료행위를 제공하였다. 매리 시콜은 그나마 이름이 남아 있는 예이지만 이 외에도 수많은 선구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처럼 오늘날 간호사들이 수행하는 다양한 업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수녀나 신분이 높지 않은 여성들이 교육을 받지도 않고 대부분 무보수로 경험적으로 수행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1836년에 최초의 간호학교가 독일에 개설되기에 이르렀는데, 성직자 테로도르 플리드너(Theodor Fliedner)가 카이저스베르트(Kaiserswerth)에 세운 간호학교는 나이팅게일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크리미아 전쟁터의 야전병원에서 위대한 업적을 거둔 그녀는 환자를 간호하는 직업으로서의 간호사 양성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국민들이 보내준 후원금으로 1860년 영국의 성 토마스 병원 내 나이팅게일 간호학교(Nightingale School of Nursing)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간호교육을 시작하였다. 1868년에는 미합중국에서 엘리자베스 블랙웰(Elizabeth Blackwell)에 의해 최초의 간호사 양성소가 개설되는데도 영향을 주었다[10].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들에게 조용한 환경에서 위로가 되는 온화한 표정으로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표준과 규율을 포함한 도덕교육을 하고, 정직하고 흐트러짐 없는 진지한 상태로 환자를 대하며, 존경을 표시하고 경쟁력을 지니며 논리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가지도록 교육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간호직이 단순히 의사의 일을 보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환자 치유에 필요한 새로운 역할을 찾아내고 그것을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전수함으로써 오늘날 간호직이 전문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23]. 이후 의료분야 내 다양한 새로운 직종이 생겨나면서 오늘날과 같은 의료체계의 기틀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크리미아 전쟁은 종군기자들이 거의 처음으로 참여한 전쟁이고, 그게 가능했던 것은 1832년에 사무엘 모스(Samuel Morse) 등에 의해 개발된 전신기술을 이용하여 기사의 전송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더 타임즈(The Times) 기자로 활동한 윌리엄 러셀(William Howard Russel)은 22개월간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면서 전쟁의 참상과 전쟁터의 병원의 상태가 매우 열악하다는 기사를 썼다[24]. 크리미아 전쟁 초기 7개월 동안 병원 내 입원 병사들의 사망률은 60%에 이를 정도로 열악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상세하게 본국으로 타전되었다. 전쟁을 하다 죽는 이보다 열악한 시설과 환경으로 인한 감염병으로 사망하는 자가 더 많다는 기사가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전쟁수행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던 시드니 허버트는 나이팅게일에게 스쿠타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봐줄 간호(여)단을 조직하도록 요청하였고, 나이팅게일은 이를 받아들여 1854년 10월에 터키의 크리미아 전쟁터로 출발하였다[12].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이 전쟁터 전초기지에 가 본 적이 없었으므로 군의관들은 나이팅게일이 이끌고 온 간호단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남성 위주의 군대에서 여성이 주도하는 개혁은 전례가 없는 것이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18].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스쿠타리의 병원시스템 개선에 매진하였다[17]. 그녀는 부상자가 병원에서 고통을 받는 원인을 찾아내고자 끊임없이 데이터를 분석하였고 그 결과 그러한 참혹한 상황은 부실하고 불합리한 정책과 제도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6, 17]. 사실상 어떤 조직체계도 갖추어지지 않은 격동의 혼란한 환경에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그녀는 세탁소, 부엌, 새로 지은 막사를 포함하여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하나씩 마련해 나갔다[11]. 그녀는 야생동물로 들끓는 막사(barracks)를 깨끗이 하기 위해 청소에 힘을 쏟았다. 위생을 개선하고 군수품을 철저히 관리하였으며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다[12].
나이팅게일의 야전병원 실태에 관한 데이터를 포함한 전장의 소식은 종군기자인 러셀에 의해 생생하게 전달되었고 그녀의 헌신적인 활동은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24]. 크리미아 전장의 막사병원의 규모가 4,000 병상으로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으므로(cwfn.uoguelph.ca) 나이팅게일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의 생명을 구했는지, 그리하여 당시 영국 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나이팅게일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고 분석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지지와 설득을 이끌어 냄으로써 지속적으로 병원을 개혁해 나갈 수 있었다.
1856년 나이팅게일이 크리미아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오자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되었다. 이때부터 나이팅게일은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사회제도와 정책을 변화시키고자 본격적으로 학술 및 저술활동에 몰입하였다. 당시 나이팅게일은 200편이 넘는 책, 팸플릿, 보고서를 출간하였으며, 이중 <영국군의 건강, 효율성 및 병원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Notes on Matter Affecting the Health, Efficiency, and Hospital Administration of the British Army)>라는 제목의 800페이지에 이르는 보고서에는 나이팅게일이 크리미아 전쟁에서 경험한 사실과 수많은 데이터를 그림, 챠트, 통계로 분석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21]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이팅게일은 자신이 작성한 기록물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출간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출판물에 많은 관심과 지지를 나타냈으므로 당시 정책결정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20]. 그 결과 군병원과 막사의 시설과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고 첫 육군(군사)의학교가 설립되었으며[25], 1860년에 마침내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나이팅게일이 꿈꾸어 오던 최초의 비종교적 배경의 간호교육기관인 나이팅게일 간호학교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크리미아 전쟁에서 보여준 나이팅게일의 눈부신 활약과 놀라운 결과, 그리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소명과 열정으로 인해 그녀가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에 큰 힘이 실리면서 단기간에 큰 변화를 이끌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그녀는 1만 2천통에 달하는 엄청난 편지를 써서 군대의 위원회, 정부 관리, 왕족, 독지활동가, 그 외에 다른 유명한 정책 입안자들을 설득하여 군대의 시설과 의무행정 개선, 민간병원 개혁, 간호교육 및 간호사업 확대, 사회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나갔다[26]. 나이팅게일은 후에 국제적십자사 창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크리미아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보건의료상황에도 관심을 가졌다. 인도에서는 여전히 오염된 물, 열악한 배수시설, 좁은 공간에 과밀하게 거주하는 주거상황, 환기 부족 등으로 높은 사망률을 나타내었다. 1858년부터 1863년까지는 인도로 가서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공중보건과 위생상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17]. 나이팅게일은 인도의 시골에서 광범위하게 위생상태를 조사하여 통계적으로 자료를 제시하였고 이는 인도의 공중보건의료 상태를 개선시키기 위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1863년에는 <인도에서 군대의 위생상태에 대한 관찰(Observations on the Sanitary of the Army in India)>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인도의 육군 위생상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25]. 이처럼 전쟁터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는 병사보다 질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병사가 많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이 크리미아 전쟁이었고 이로 인해 여론이 들끓었으며 이것이 사회 전반의 개혁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이팅게일의 실천적 사회운동가로서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나이팅게일은 특히 통계학적 그래프를 이용하여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녀는 스쿠타리 병원에서 활약하면서 대부분의 사망자가 작전 중 사망하기보다는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한 감염이나 질병으로 사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알리고자 색깔과 면적의 크기를 활용한 로즈 다이어그램(Rose Diagram)을 개발하여 1년 동안 동부 전장에서 전쟁으로 사망한 병사와 질병으로 사망한 병사의 수를 그림으로 비교하여 제시했다. 이를 통해 위생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었고 이는 결국 위생이라는 개념이 병원에 도입되도록 촉진하였으며, 그녀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로즈 다이어그램의 위력은 통계수치를 나타내는데 그림을 활용하는 시대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19]. 나이팅게일은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의료적 처치에 대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면서 이와 같은 다이어그램을 널리 이용했다. 전통적인 통계보고서에 익숙한 의회나 시 당국자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해하기에는 쉬웠다. 나이팅게일은 1859년에 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74년에는 미국 통계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크리미아 전쟁이 끝난 후 당시 영국령이었던 인도에서 활동한 경험을 토대로 그녀는 1859년에 왕립위원회를 결성하게 했고, 1863년에 인도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또한 10년 후인 1873년에는 인도에서 병사들의 사망률이 1,000명당 69명에서 18명으로 감소되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22]. 이러한 활동보고서에도 그녀는 통계수치를 그림으로 알아보기 쉽게 표현했다. 이와 같이 나이팅게일은 통계학적 지식과 이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는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은 기득권자들의 반대를 효과적으로 설득해 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160여 년 전에 이미 데이터의 힘을 보여준 혁신가라 할 수 있다[23].
놀랍도록 높은 사상자 비율을 낸 크리미아 전쟁은 결과적으로 의료시설 전반을 혁신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나이팅게일이 보여준 탁월한 행정력과 성과는 간호사에 대한 편견을 타파하고 여성의 능력과 지위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키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당시 여성의 지위는 전반적으로 낮았고 남성의 부속물처럼 간주되었으며 여성의 사회활동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으므로 상류층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경우는 드물었다[7]. 이러한 상황에서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는 수준 높은 간호사를 배출하여 이들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나이팅게일식 간호교육과 보건의료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영향력을 상당히 진척시킬 수 있었다[7, 20]. 나이팅게일 이후 모든 전쟁은 여성의 사회적 해방과 공적 책임을 현저하게 신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26]. 그녀는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Order of Merit)을 받은 최초의 여성으로[25],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보건, 의료, 복지와 관련하여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강조하기도 하였다[23].
나이팅게일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며 발생한 COVID-19 팬데믹은 간호학과 간호사가 사회적 문제 해결에 얼마나 크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감염병 환자가 넘쳐났던 크리미아 전쟁터에서의 나이팅게일의 활약과 삶을 반추하면서 그녀가 남긴 유산을 통찰해 보는 것은 간호학, 보건의료분야, 나아가 사회 전체에 걸쳐 기념비적 업적을 이룬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이자 유래 없는 팬데믹 상황에서 간호학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데 유익한 길잡이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살펴본 나이팅게일의 사회개혁가로서의 철학, 성공요인 및 유산을 아래와 같이 논의해 보고자하며, 마지막으로 COVID-19 팬데믹을 극복해 나가는데 그녀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을지를 조망해 보고자 한다. 사회개혁가로서의 나이팅게일은 소명의식으로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나 그 저변에는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이익과 사회적 수호자로서의 삶을 추구한 플라톤 철학(Platonism)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3, 8] 실제로도 그녀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9]. 나이팅게일이 간호학문을 창시한 배경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사회적 격동기에 혼란과 참상의 현장에 참여하면서 얻은 경험에 기반하여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학문을 창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간호학은 단순히 의사를 보조하거나 질병을 가진 환자에만 국한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시키는 것까지를 포함한 학문으로 시작하였으며[3], 이것은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나이팅게일이 생각하고 실천하고자 하였던 간호철학이자 간호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개혁가로서의 나이팅게일의 성공요인은 크게 사회적/시대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우선, 사회적 및 시대적 요인으로 19세기 중반은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감염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고, 이에 대한 원인으로 미아즈마 학설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위생에 대한 개념이 중요해진 시기였다[13, 14, 15]. 미아즈마설을 신봉하였던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환기, 채광, 청결, 손씻기 등을 실천하여 실제로 환자들의 사망률을 현저하게 낮출 수 있었고[13] 이러한 성과는 나이팅게일이 병원을 개혁하고 나아가 사회를 개혁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간호학적 관점에서 나이팅게일이 강조한 ‘위생’의 개념은 ‘최적의 환경 유지’의 개념으로 확장되어[19] 간호의 주요 메타파라다임이 완성될 수 있었다[3, 8]. 당시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환경적인 측면에서의 간호를 강조했을 뿐 아니라, 물리적, 시스템적,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을 모두 포함하여 수많은 간호이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최초의 간호이론가이자 약자의 편에 서서 이들을 옹호했던 임상전문가로서[3], 이러한 나이팅게일의 생각과 실천은 오늘날까지도 간호의 중요한 덕목이 되고 있다.
사회개혁가로서의 나이팅게일의 또 다른 성공요인으로 개인적 역량이 크게 작용하였다. 우선, 나이팅게일은 다방면에 출중한 재능을 겸비한 타고난 폴리매스였기도 했지만[16] 사회의 수호자로서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 발굴하여 연결하고 협상기술을 적절히 활용하였다[6, 11, 12]. 또한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돌파해 나가면서도 다양성을 수용한 점이[19] 당시의 관료적 사회를 설득해 나갈 수 있었다. 특히, 나이팅게일은 모든 종교적, 문화적인 차이를 인정하며 어떠한 차별도 없이 임하였으며. 이것은 오늘날 이슈가 되고 있는 문화적 포용성과도 관련된다[19, 21]. 다양성을 인정하는 그녀의 태도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으며, 이는 40년 동안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심각한 위생문제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던 그녀의 헌신적인 업적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본 연구를 통해 사회개혁가로서의 나이팅게일의 유산은 크게 ‘간호학 창시(founding of modern nursing), 보건의료시스템 개혁(reform of healthcare system), 사회변화 촉진(promotion of social change), 보건통계 활용(adoption of statistics in healthcare), 여성해방(emancipation of women)’ 등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로서의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독립된 교육기관으로서 최초의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간호사라는 전문직업을 탄생시켰다. 나이팅게일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체계적이고 전문직의 특성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호교육과 간호실무를 확립하였으며[3] 간호를 여성을 위한 존경받는 직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8].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졸업한 간호사들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 학교, 병원, 시설, 군대 등에서 나이팅게일식 간호를 확산시켰고, 이들의 역할을 통해 간호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하나의 학문으로 정착함과 동시에[5] 여성의 전문 직업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27]. 간호학이 질병과 전문적인 기술을 강조하였던 의학과 달리 전인적 관점으로 환자를 대하는 학문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적 요구를 간파한 나이팅게일의 간호철학과 통찰력 덕분이라[3] 할 수 있다. 둘째, 나이팅게일이 스쿠타리 병원에서 병원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병원환경의 끔찍한 참상과 환자들의 높은 사망률 때문이었다[6, 13]. 당시 위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나이팅게일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과 환자의 자연치유력을 증진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병원 전체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였다. 병원의 구조와 배치, 최적의 환기와 채광 유지, 교차감염을 줄이기 위한 적절한 공간 확보, 시설과 비품 배치, 물품 보급 및 관리, 환자 편의 및 복지, 간호사 교육과 이를 위한 시설 확보 등 광범위한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병원개혁 결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고 높은 사망률이 현저하게 감소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개혁방법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17, 27]. 병원개혁 노력은 귀국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858년에 출간한 <Notes on Hospital>에서 병원의 내부구조와 시설이 환자의 건강상태와 사망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기술하였고 표준화된 병원의 설계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 분야 전문가가 없었으므로 나이팅게일의 병원 운영 경험과 의견은 매우 설득력이 높았으며 이에 정부 차원에서 팀이 꾸려지고 영국 내 대대적인 병원개혁이 착수되었다[27]. 나이팅게일은 병원 내 높은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환자 중심의 병원구조의 설계와 운영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함으로써 오늘날의 병원구조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이팅게일은 플라톤의 철학에 기반하여 더 나은 병원, 더 나은 건강,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였으므로, 그녀의 모든 활동과 비전은 궁극적으로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를 촉진하는 일과 맞닿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타고난 결단력과 선견지명, 위험을 감수하는 과감한 리더십을 갖춘 나이팅게일은 흔히 오늘날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요구되는 혁신과 창의성의 원칙을 적용하여 창의적인 해결책을 통해 변화를 가져오는 방식으로 개혁해 나갔다[5].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는 당시에 이미 포괄적인 건강관리 시스템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노인, 사회적 약자, 장애자 및 궁핍한 부모의 자녀를 돌보는 시스템 구축과 소득 보장 제도를 통해 복지 국가에 이르는 핵심 원칙까지도 통찰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이다[20]. 또한 그녀는 이상을 관념적으로 추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 참여와 실천을 통해 이상을 직접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운동가였다[11, 12].
넷째, 나이팅게일은 크리미아 전쟁 당시 병원의 시스템 개선을 추진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숫자와 통계를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따라서 나이팅게일은 환자, 물품, 자원 등의 현황을 파악하여 숫자와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병원관리자이자, 데이터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한 의료분야 최초의 통계학자라 할 수 있다[20]. 이와 같은 접근은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나이팅게일은 연구방법론의 선구자로도 평가받고 있다[27]. 귀국 후에도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데이터 활용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병원개혁의 확대는 물론 사회시스템 전반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었다[2]. 나이팅게일의 이러한 유산은 병원의 위생상태를 개선시키고 환자들의 유병률과 사망률을 감소시키는 근거(evidence)로 활용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간호학이 근거를 기반으로 한 과학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28].
다섯째, 나이팅게일은 여성의 전문직 진출과 사회참여를 촉진함으로써 페미니즘적 사조를 확산시킨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20]. 나이팅게일은 본격적으로 간호직에 헌신하기 이전부터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큰 관심을 가졌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당시 사회에서 진보적이었던 가족들마저 극구 만류하였으나 나이팅게일은 사회에 공헌하면서 독자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의 이러한 생각 역시 플라톤 철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8]. 플라톤은 여성의 역할을 가정으로 제한시키는 것은 낭비이며 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남녀 모두에게 진리를 찾도록 교육하고 남녀가 동등하게 미래의 지도자로서 역량을 갖추는데 이러한 진리가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9]. 따라서 나이팅게일이 여성을 위한 교육을 사회에 유용하게 사용하는 통로로 강조한 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일부에서 나이팅게일의 전반적인 활약상에 비해 당시 여성의 법적, 사회적 지위가 열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권익이나 참정권에 대해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지만 명백하게 나이팅게일은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였다[7]. 뿐만 아니라 간호를 종교적인 봉사 관점이 아닌 공적인 제도권 안에서 교육받은 직업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여성 역할의 중요성과 가치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여성의 권익이 점차 향상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7, 20]. 이상의 5가지 유산에서 볼 수 있듯이 나이팅게일이 추구하였던 간호학은 그 대상이 환자 개인에 그치지 않고 간호교육, 환경관리, 병원행정, 사회개혁, 데이터 관리, 사회적 불평등 해소 등 거시적인 범주까지 포함하고 있는 메타 학문임을 알 수 있다. 나이팅게일 이후 수많은 임상간호사와 간호학자들의 노력으로 간호학은 전문화 및 고도화되었을 뿐 아니라 독자적 과학학문으로서의 자리를 견고하게 굳혀오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히려 간호학의 활동 영역이 임상 중심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다는 비판도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바, 나이팅게일이 유산으로 남긴 메타학문으로서의 간호학의 위상과 영역을 원래대로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1].
주목할 점은, 마치 평행이론처럼 크리미아 전쟁터에서 나이팅게일이 불굴의 투지로 환자의 생명을 구한 것과 같이 COVID-19 현장에서 수많은 간호사들이 가장 최전선에서 환자를 보살피고 혼란스러운 시스템을 개선하며, 사회를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나이팅게일의 간호가 추구했던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수호자”로서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나이팅게일의 사회개혁가적인 간호정신이 지금도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이팅게일이 크리미아 전쟁 시 부상병들의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적절한 손 씻기, 최적의 환경유지, 그리고 물리적 공간확보(거리두기) 등[27, 29]과 같은 환경이론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지금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적은 없었으며, COVID-19 확산을 억제하는 필수적인 전략으로 WHO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30]. 이 또한 나이팅게일의 선구자적 선견지명과 통찰력이 얼마나 정확하고 예리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것이며, 간호학이 사회적 문제해결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학문임을 증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5]. 특히, COVID-19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간호전문직은 중환자 간호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인구집단의 건강관리, 보건의료시스템 개선을 위한 정책개발과 법안 발의, 국가의 안전을 위한 제도 개선 등 미시적 수준에서부터 거시적인 수준까지 다양한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부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나이팅게일이 남긴 유산을 되새기며 이를 충실히 실천해 나가는 것이 가장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고찰을 통해 사회개혁가로서의 나이팅게일의 철학과 성공요인, 그리고 유산을 살펴보았는데 당시 시대상황이나 여성의 지위 등을 감안하였을 때 남겨진 기록들이 그녀가 남긴 수많은 유산을 충분히 드러내는데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또한 연구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사회개혁가 나이팅게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문헌 검색 시 사회개혁 관련 주요어만 포함시킴으로써 검색된 문헌의 범위가 충분하지 않았을 가능성과 제한된 문헌으로 인해 체계적인 문헌고찰의 방법을 적용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제한점이 있다. 추후 보다 체계적이고 엄격한 방법론을 통해 나이팅게일의 다양한 업적과 유산을 심층 발굴하고 타당화시키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나이팅게일의 간호학이 지닌 잠재력을 지역사회, 사회 전체, 나아가 전 인류를 대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까지도 모색해 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나이팅게일이 사회개혁가로서의 활약상 이외 정치가, 협상가, 로비스트(lobbyist)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음을 확인한 바, 이러한 유산까지도 심층 고찰하여 간호 영역에서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나이팅게일의 사회개혁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COVID-19 감염병으로 전 세계가 전쟁에 버금가는 큰 혼란과 불확실을 경험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모든 이에게 평등한 선을 이루고자 했던 사회개혁활동가, 나이팅게일의 재림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본 연구는 간호학의 창시자인 나이팅게일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나이팅게일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그녀가 남긴 간호학적 유산을 반추해 보고자 시도되었다. 문헌고찰은 9개의 전자 데이터베이스, 관련 자료, 책, 기사, 웹사이트, 2차 문헌 등을 고찰하였으며, 연구결과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이면서 사회개혁가로 활동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사회개혁가로서 그녀가 남긴 5가지 유산으로는 (1) 사회적 요구에 따라 간호학문의 창시, (2) 보건의료시스템 개혁, (3) 공공의 이익 실현을 위한 사회운동 실천, (4) 보건통계 최초 도입, (5) 여성 지위 향상 등을 포함시킬 수 있겠다. 지금까지 이러한 업적들은 각기 별개의 업적으로 기술되거나 각 업적별 의미나 의의를 탐색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본 연구는 간호학을 넘어 사회 전체를 통찰하여 활동했던 나이팅게일의 업적을 사회개혁가적 측면에서 재조명하였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와 차별성이 있다 하겠다. 또한 본 연구를 통해 도출한 5가지 유산들은 모두 더 나은 사회를 지향했던 사회적 수호자로서의 나이팅게일의 철학에서 비롯되었으며 사회개혁이라는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간호학은 단순히 보건의료계 내 하나의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할 것이 아니라 간호학 자체가 나이팅게일이 추구하였던 사회개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므로 다시 나이팅게일의 간호정신으로 돌아가 병원 중심의 간호학을 넘어서 지역사회 전반, 나아가 사회 전체를 통찰하여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간호학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갈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Year of Establishment of Occupations in the Medical FieldSupplement 1